82년생 김지영 – 조남주 작

데포소 Deposo
 

독자인 “나”는 누구?

“나”는 “외모 선호주의자”이면서, 성별에 관계없이 상대방의 광범위한 매력에 대해 아낌없는 호감을 남발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나”는 그럴싸하게 잘생긴 편이 아니면서도 상대방의 외모를 (속으로만) 알뜰하게 따진다. 하지만 마음은 열려 있어서 성별이나 외모의 품격에 따라 차별하며 교감하지는 않는다. 다만 나와 의견이 맞지 않거나 동의할 수 없는 경우에는 나도 모르게 편견을 앞세워 그 이유가 무엇인지 분석하려고 한다. 의견이 다른 원인을 주로 상대방의 외모나 성장 환경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예를 들어, 이성에게 즉각적인 호감을 주지 못할 것 같은 외모의 소유자는 이성에 대해 별반 우호적이지 않을 확률이 높다든가, 소위 예쁘거나 잘생긴 사람들은 공부에 관심이 덜하다든가라는 등의 편견 말이다.


저자인 조남주 작가의 사진을 보고서

“외모 선호주의자”로서 그 이름에 상응하는 욕구를 참지 못한 채, 저자의 여러 사진들을 검색해 보고 나서는 주체할 수 없는 깜놀의 엄습에 당황한 후 서서히 정신을 추슬렀다.

이 책을 쓸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인지 바로 알 것만 같았다. 그리고선 곧바로 번개같은 편견이 떡하니 나의 이성적인 사고체계의 작동을 뒤흔들어 놓았다. 이 편견은, 저자가 매우 평범한 외모의 소유자라는 나의 주관적 판단에서 기인된, “남성들로부터 인기가 그리 높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외모 선호주의자적인 편견이었다. 결국 저자와 교류를 해본 적도, 할 기회도 전혀 없을 것이기에 나의 편견은 검증되거나 또는 저자가 가진 특정 매력에 의해 소멸될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전혀 없는 셈이다.


의문점, 반론, 감상평

이게 과연 82년생 여성들이 일반적으로 광범위하게 겪었을 이야기들인가?
“나”의 작품이라면 책 제목을 [72년생 김지숙] 또는 [62년생 김지순]이라고 했을 것만 같다. 
82년생이면 몇 살인지 한참을 계산했다. 딱딱해져만 가는 뇌를 돌려서 2019 빼기 1982라는 계산을 돌렸다. 2000 빼기 1982는 18!. 거기다가 19를 더하면 37살 인가? 아참 태어나면서부터 한 살인 한국식 나이 계산법을 따라 여기다가 1을 더하여 주니 38! 

80년대 생이라는 존재가 까마득하게 머나먼 후배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내일모레 마흔 살이라는 계산 결과에 적잖이 놀랐다. 아마도 내가 이미 꼰대의 대열에 속해가고 있다는 침울한 메시지 같아서 조금은 씁쓸했다. 그리고는 “그래 낼 모레 40이면 70, 80년대 또는 그 이전에 당하던 여성차별을 아주 드물게나마 경험했을 수도 있는 가능성이 희박하게나마 전혀 없지는 않았을 수도 있을지 모르겠어”라는 극단적으로 소박한 이해심이 들었다.


여성들만 차별을 당해왔는가?

남성이라는 이유로 여성에게 양보해야 했고, 힘을 써야 되는 일은 당연히 감당해야 했고, 체벌이든 무슨 훈련이든 더 오래 더 많이 해야 했던 기억을 떠올릴 남성들도 있을 것이다. 약하니 보호해야 되고, 예민하니 이유가 불명확한 행동을 해도 가급적 참아줘야 되는 대상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남성들. 아무리 슬퍼도 울어서는 안되고, 괴로워도 힘들어서는 안되고 고통스러워도 아파해서는 안되는 남성들. (자발적) 배려 아닌 (수동적) 배려를 해야만 했던 기억도 상당수 존재할 것이다.

“군 복무”는 본능적으로, 유전공학적으로, 인체공학적으로, 가정관리학적으로, 원초적으로, 역사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도 응당 남성들이 쿨하게 완수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을 일일이 따지면서 살아 본 적은 없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그런 순간들이 셀 수 없이 많았고, 많고,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남 차별의 근본적 배경이 무엇이었지?

유교적, 농경사회적, 가부장적 문화와 전통이 사회 전반에 군림하던 시절의 남녀평등을 논할 가치는 없다고 본다.

노동력과 물리력이 삶 속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던 그 오랜 시간 동안, 성별에 따른 가치가 차별화됐던 것은 누구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당위성이 있었다. 그래도 권력을 누리는 만큼 의무를 다하기 위해 뼈와 살을 태우던 남성들이었다. 그 남성들은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불철주야 일을 했고, 그들의 아내들은 가사와 육아를 책임져야 했다. 


그것이 일반적인 남성 또는 가장의 모습이었다. 이러한 일반적이고 지극히 정상적인 가장과 가정의 모습이 아닌, 뉴스로 간택되는 영광을 입거나 세간의 이목을 끌만한 사례들로 일반화를 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농촌과 저임금 노동자 가정, 다문화 가정에 속한 여성들에 대해서는 또 다른 시각에서 관심을 가지고 고찰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사회가 여성보다는 남성을 선호한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쫌

교사, 공무원 및 일반 기업 회사원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여성들의 약진이 두드러진 현상을 굳이 통계를 들지 않아도 뉴스를 접하거나 주변을 둘러보아도 알 수 있는데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가 안 됐다.

근속 기간, 노동시간을 고려하고 무엇보다도 동일 직종에 종사하는 여성과 남성을 비교하여 임금 격차를 논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여성과 남성 전체의 평균 임금을 분석하면서 차별이라면 이건 사과 대 사과 (Apple to Apple)가 아니라 사과 대 호박이 되어서 올바른 비교가 되지 않는다.


유력 기업의 채용 담당자 설문조사 관련 기사와 자료를 인용하면서는 “구직자 중 남성을 선호한다”라는 항목은 언급하고 “구직자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관계없다”라는 항목은 누락시킨 저자의 인용 방식은 경악할만했다. 자신의 논지에 걸맞은 정보는 부각시키되 반하는 정보는 가위질하여 도려내는 악마의 편집식 인용이 아닌가. 선정적인 제목과 기사로 대중을 호도하는 기레기들의 작태를 그대로 답습하는 선동 행위로 보였다.


전통적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선호도가 떨어지는 주된 원인은 결혼, 출산, 육아로 이어지는 “사회경력 단절”에 있다. 여성이 이러한 면에서 불이익을 받고 있다면 경력단절이 되지 않도록 제도를 바꾸는데 지능과 노력을 사용하면 된다.


여남 차별이 문제인가? 그러면 지역 간, 계층 간, 세대 간 차별의 심각성은 어떤가?

군부 독재 시절, 사회과학 책들을 읽고, 토론하면서 “양성평등”이라는 주제를 탐구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여성이나 남성 공히 고통받으며 버텨내야 했던 왜곡된 사회구조의 실체를 발견하고, 그 모순된 구조에서 “우리 모두”가 해방되기 위한 방법을 찾고 염원했었다. 그 모순된 사회구조에서 해방되었을 때 비로소 진정한 평등 세상, 민주 사회가 구현될 수 있다는 취지였다. 그 후로 수 십 년이 흘렀고 사회 모든 분야가 발전하고 성장했지만 “우리 모두”를 짓누르던 다양한 형태의 모순과 차별, 반목, 질시, 불평등은 개선되고 나아졌을까?

과연 우리는 지성, 이성 그리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와 시스템이 사회 근간이 되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을까?라는 질문을 먼저 던지고 싶다. 권리와 의무에 대한 동등한 접근 및 합리적인 이행 방안들이 제도적, 의식적인 뒷받침을 바탕으로 시행되지 않으면 결코 해결될 수 없는 문제가 아닐까. 사회 시스템의 숨통을 조이며 평범한 (평안, 평온, 평화로운 도 아닌 그냥 평범한) 삶을 위협하는 구조적 모순과 불합리한 제도들이 넘쳐나는데 그 안에서 남성은 자유롭고 여성은 속박되어 고통받고 있을까?


마무리

일부 심각하게 평등을 침해하는 사례들이 광범위하게 자행되었거나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는 듯한 전개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자신의 논지와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특정 정보만 인용함으로써 제시한 근거의 객관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인류 평등, 박애 정신, 인권 존중 같은 대의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가치와 이념들이 더욱더 절실해져 가는 복잡 다난한 현시대에서, 여남의 갈등을 조장하는듯한 자세는 양식 있는 지성인으로서 추구해야 할 가치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모든 갈등과 이견은 서로에 대한 명확하고 전향적인 이해가 바탕이 된 대화와 교류 그리고 해결방안 모색이 병행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다양한 대중매체로부터 전달되거나 꾸역꾸역 파고드는 선정적, 자극적인 뉴스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호구가 되지 말고 사회의 병폐와 패악 그리고 그것들을 어떤 방법으로 해결해야 할지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가지고 중심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


“사회”라는 거대한 덩어리는 신속히 바뀌거나 원하는 만큼 멋지게 발전하는 그런 조직체가 아니다. 어떠한 방향으로든 “개혁”이 절실한데도 “개혁의 주체”들이 서로를 헐뜯으며 다투느라 “개혁의 대상”들을 상대하지 못하고 그들이 의도하는 대로 분열되어 있다. 노인과 젊은 세대가, 비싼 수저와 흙 수저가, 여성과 남성이, 소상공인과 저임금 노동자들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반목하고 다투느라 정신이 없다. 일부 언론들이 선동하고 좌절감을 안겨주는 그 악마의 노래에 휘청거리지 않는 가치관이 확실한 시민이 되어야 한다.


양식이 있는 지성인이라면 “개혁 주체”들의 연대와 단결을 위해 자신의 역량을 보태는 사람이 되어야지, 시류에 편승하고 대결 구도를 이용하여 단물만 쏙 빨아먹으려는 그 이기적인 얄팍함을 버려야 한다.


소득불평등 세계 2위, 재산 하위 50% 인구가 소유한 부가 전체 부의 1.73% 밖에 안되고 상위 10%가 소유한 부가 70%에 육박, 중산층 붕괴, N 포 세대, 노인 빈곤율 1위, 자살률 1위, 인구 절벽, 미중 갈등과 4차 산업혁명에 의한 불확실성, 기초 자본제 또는 기본 소득제 등의 우울하고 불투명한 현실들을 굳이 내세우지 않아도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우리 모두”가 선택하고 나아가야 할 길이 어디일까?


나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마침내 하나 됨을 위하여”로 가는 길이 아닐까.


사족

그냥 순간적으로 생각난 것들을 붓 가는 대로 허접하게 쓴 것이니 혹시나 너무 과장됐다거나, 얼토당토않다거나 또는 헛소리스럽다는 느낌이 들더라도 참아 주세요. 다른 의견이나 반론이 있으시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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